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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축구대표팀 유니폼은 왜 국기 색상과 다를까 [이정우의 스포츠 랩소디]

축구 국가대표팀의 유니폼 색상은 주로 자국의 국기로부터 따 온다. 물론 예외도 있다. 전통적인 축구 강국 중에는 독일, 네덜란드, 이탈리아가 대표적이다. 신흥 강국 중에는 일본과 호주가 있다. 최근의 독일대표팀은 2018, 2022 월드컵에서 16강 진출에 연달아 실패하며 부진에 빠졌지만, 전통적으로 이들은 꾸준함의 대명사였다. 독일은 월드컵에 19번 출전해 8강 이상을 16번 기록했고, 결승전 최다 진출국(우승 4번, 준우승 4번)이다. 뛰어난 축구 실력과 더불어 독일대표팀은 아름다운 셔츠를 종종 선보이며, 글로벌 축구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독일대표팀의 홈 셔츠는 흰색이다. 국기 색상인 검정, 빨강, 금색(노랑색이 아님)과 연관이 없다. 예전에 이에 관한 주제를 다룬 적이 있지만, 필자의 글을 처음 접하는 분들을 위해 간략히 소개한다.키트 색상의 역사는 11세기 말에 시작한 십자군 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성지 예루살렘을 무슬림으로부터 되찾기 위해 많은 가톨릭 수도회가 생겼다. 수도회에 속한 이들은 수도자이자 기사였다. 이 중 대표적인 기사단이 구호기사단, 성전기사단, 튜튼기사단(독일기사단)이다. 튜튼기사단은 예루살렘이 위치한 레반트 지역과 발트해의 기독교인을 보호했다. 튜튼기사단은 13세기 초반 발트해 남동쪽에 독일 기사단국을 세웠다. 16세기 초반 기사단국은 세속 국가로 전환하며 프로이센 공국이 되었다. 1701년 왕국으로 승격한 프로이센은 1871년 분열된 독일 민족을 통일하며 독일 제국을 출범시켰다.독일 축구대표팀 키트의 색상은 1926년 이후부터 흰색 셔츠, 검은색 바지에 흰색 양말이 되었다. 블랙과 화이트로 구성된 프로이센 국기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이다. 또한 프로이센의 국기는 튜튼기사단의 상징을 바탕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독일팀의 홈 키트 색상은 십자군 전쟁에서 유래했다.195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TV에서 축구가 중계되었다. 경기장의 관중들은 한 팀이 파란색 다른 팀이 빨간색 혹은 검은색 셔츠를 입어도, 두 팀을 구분하는 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흑백 TV를 통해 경기를 보는 시청자들에게는 혼란을 일으켰다. ‘두 번째 색상(second color)’을 가진 어웨이 셔츠가 본격적으로 나오게 된 계기다.1954 스위스 월드컵에 참가한 서독대표팀의 어웨이 셔츠는 녹색이었다. 이후 2000년까지 녹색이 짙어지거나 다른 색상과 혼합될 때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녹색은 이들의 어웨이 셔츠 칼라였다. 축구 팬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독일대표팀은 자신들과 별 상관없이 보이는 녹색을 생뚱맞게 택했기 때문이다. 이에 그럴듯한 스토리가 만들어진다. 2차대전 후 전범국이 된 서독과 축구를 하고 싶은 유럽 국가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때 아일랜드가 곤경에 빠진 서독에 손을 내밀어 경기를 갖게 된다. 이후 서독축구협회는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아일랜드의 상징 색상인 녹색으로 어웨이 셔츠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낭만적인 스토리는 오랫동안 사실처럼 축구팬들 사이에 떠돌았다. 심지어 현재 구글에서 검색을 해도 이렇게 설명이 된 경우가 꽤 있다. 하지만 현실은 주로 낭만과는 거리가 멀다.팩트를 얘기하면, 아일랜드는 서독과 축구를 처음 한 국가가 아니다. 전쟁 후 서독과 맞대결한 첫 번째 나라는 스위스였다. 1950년 11월 슈투트가르트에서 열린 서독과 스위스의 친선 경기에는 무려 10만 2000여 명의 관중이 모일 정도로 큰 관심을 끌었다. 1942년 11월 슬로바키아전을 마지막으로 8년 만에 열리는 국가대표팀 경기였기 때문이다. 결과는 서독의 1-0 승리. 서독팀은 1951년 4월 스위스와 리턴 매치를 했고, 6월 베를린에서 터키와 경기를 가졌다. 9만여 명의 관중이 모인 터키와의 경기 때 서독은 처음으로 녹색 셔츠를 착용했는데, 1-2로 패했다. 이후 서독은 오스트리아와 경기를 했고, 같은 해 10월 더블린에서 마침내 아일랜드와 대결해 2-3으로 졌다.그렇다면 녹색의 기원은 도대체 어디일까? 나치 시절의 독일축구협회(DFB)는 이니셜 D, F, B를 검은색, 흰색, 빨간색으로 표시했다. 흑-백-적은 독일 제국의 국기색으로 제국주의와 군국주의의 상징이었고, 1933년 히틀러의 나치당이 바이마르 공화국을 해체하며 부활시킨 색상이다. 종전 후 1949년 DFB가 재조직되면서 새 로고가 만들어졌다. 축구장의 피치를 상징하는 녹색이 협회의 시그니처 칼러가 되었고, 그린 색상의 어웨이 셔츠는 이렇게 탄생했다. 하지만 21세기 들어 독일 국기의 색상인 검-적-금이 DFB의 로고에 추가되면서, 어웨이 셔츠도 녹색 일변도에서 변하기 시작했다. 독일팀은 2002 월드컵에는 ‘두 가지 색으로 된 회색(two-tone grey)’, 2004 유로에는 검은색 어웨이 셔츠를 선보였다. 2006년 자국에서 개최한 월드컵 때는 당시 감독이었던 위르겐 클린스만의 강력한 제안으로 빨간색을 어웨이 색상으로 정했다. 많은 팬들이 익숙한 녹색으로 돌아오길 바랐지만, 클린스만은 “적색 셔츠가 팀에게 심리적 우위를 주고, 행운을 가져오길 바란다”고 주장했다. 클린스만의 기대와는 달리 월드컵을 앞두고 열린 평가전에서 적색 셔츠를 입은 독일팀은 1승 3패로 저조했다. 그나마 거둔 1승의 상대도 약체인 남아공이었다. 클린스만은 “월드컵 본선에서 가능한 자주 적색 셔츠를 입을 것”이라고 밝혔지만, 독일대표팀은 2006 대회 때 치른 모든 경기에서 흰색 셔츠를 입었다. 참고로 독일이 월드컵과 유로에서 각각 4번, 3번 우승했을 때 그들은 언제나 흰색 홈 셔츠를 착용했다.경희대 테크노경영대학원 객원교수 2024.03.01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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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 본능을 가르치라고 감독을 맡길 순 없다 [이정우의 스포츠 랩소디]

2002 한일 월드컵의 영웅 거스 히딩크부터 최근에 경질 당한 위르겐 클린스만까지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은 13명의 감독과 함께했다. 이 가운데 한국인 감독은 허정무, 조광래, 최강희, 홍명보, 신태용이었다. 선수 시절 유틸리티 플레이어였던 허정무는 공격수인 윙어와 공격형, 중앙, 수비형 미드필더 등으로 뛰었다. 나머지 4명 감독들의 선수 시절 포지션은 미드필더와 센터백(중앙 수비수)이었다.클린스만을 제외한 외국인 감독 7명의 선수 시절 포지션 역시 미드필더와 센터백이었다. 히딩크와 조 본프레레는 미드필더였다. 국내 일부 자료는 본프레레가 스트라이커라고 표시하고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움베르투 코엘류는 센터백, 핌 베어벡은 수비수와 미드필더를 맡았다. 울리 슈틸리케는 홍명보와 같은 포지션인 센터백과 수비형 미드필더였고, 딕 아드보카트와 파울루 벤투도 수비형 미드필더로 뛰었다. 21세기에 한국대표팀 감독이 된 인사 중 스트라이커 출신은 클린스만이 유일하다. 당연한 얘기지만 축구의 궁극적인 목표는 골을 넣는 것이다. 따라서 골 넣은 역할에 특화된 스트라이커는 많은 연봉과 인기를 누릴 수 있는 매력적인 포지션이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축구 역사상 출중한 스트라이커는 꽤 많았지만, 이 들 중에서 명장이 된 케이스는 손꼽을 정도다. 미국의 스포츠전문채널 ESPN은 2022~23시즌에 가장 빛난 축구 감독 베스트 10을 발표했다. 10명의 감독 중 스트라이커 출신은 몇 명일까? 단 한 명이다. 표에 보이듯이 9위를 차지한 시모네 인자기만 스트라이커 출신이다. 선수 시절 시모네는 세리에 A 최고의 스트라이커이자 친형인 필리포 인자기의 그늘에 가려 있었다. 시모네는 스트라이커로서 좋은 활약을 펼친 적도 잠깐 있었지만, 스타 선수는 아니었다. 다시 말해 스트라이커란 배경보다는, 시모네는 유소년 지도자부터 시작해 꾸준하게 경력을 쌓고 공부한 끝에 세계적인 감독이 된 것이다. 세계 최고의 축구리그로 꼽히는 프리미어리그(EPL)의 사정은 어떨까? 2023~24시즌 현재 EPL의 20명 감독 중 스트라이커 출신은 없다. 골키퍼 출신의 감독은 원래 축구에 드문 가운데, 누누 산투가 현재 노팅엄 포레스트의 감독이다. 스트라이커 출신 감독은 EPL에서 씨가 말랐다. 독일의 분데스리가에도 스트라이커 출신의 감독은 2명 밖에 없다. 게다가 이들이 지휘하는 FC 아우크스부르크는 하위권, 마인츠 05는 강등권에 있을 정도로 성적이 좋지 않다.미드필더와 수비수 출신에서는 종종 훌륭한 감독이 나온다. 그에 반해 화려한 스트라이커 출신으로 명장의 반열에 오른 현역 감독은 로베르트 만치니가 거의 유일하다. 스트라이커의 범위를 넓히고 은퇴한 이들까지 포함해도 케니 달글리시, 유프 하인케스, 포워드와 공격형 미드필더를 겸했던 요한 크루이프 정도다. 좀 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1950년대 미들즈브러의 출중한 스트라이커 출신으로 노팅엄 포레스트에게 유러피언컵 2연패를 안긴 명장 브라이언 클러프도 있다. 보통 미드필더 출신들이 뛰어난 감독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이에 대한 이유로 2019년 펩 과르디올라는 “스트라이커는 골을 기록하는 것에 집중하는 반면, 홀딩(수비형) 미드필더는 피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비전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즉 상대의 공격을 깨고 카운터 어택을 효과적으로 만들려면 홀딩 미드필더는 적의 움직임과 전술을 이해하는 등 경기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출중해야 한다는 의미다. 또한 감독에게 요구되는 중요한 역할 중 하나가 침착함과 통제력인데, 보통 기술적으로 가장 완전한 선수인 중앙 미드필더는 모든 방향에서 오는 압박을 받는 데 익숙하다.과거의 스트라이커는 페널티 박스 근처에 머무르며 골을 넣는 데 집중했다. 따라서 경기 전체의 흐름을 읽기 힘든 이러한 포지션의 특성은 뛰어난 감독이 되는 데 걸림돌이 됐다. 하지만 현대 축구는 ‘가짜 9번(False 9)’을 사용하는 등, 스트라이커에게 다양한 역할을 주문한다. 과거의 스트라이커보다 훌륭한 감독이 되기에 유리한 조건이 형성된 것이다. “스트라이커는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태어난 것이다(Strikers are not made, they are born)”라는 말이 있다. 반복된 연습에 의해 마무리 기술은 향상될 수 있다. 그러나 훌륭한 스트라이커가 적절한 타이밍에 적절한 자리에 있는 위치 선정은 우연도 아니고, 학습으로 익힐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언제 기회가 있을지 감지한다.플레이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은 분명히 다른 일이다. 스타 선수가 반드시 명장이 되지 않는 이유다. 본능은 가르칠 수도 없기 때문에 스트라이커 출신은 명장이 되기 더 힘들지도 모른다.경희대 테크노경영대학원 객원교수 2024.02.23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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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린스만은 실패한 헤드 코치일까, 무능한 매니저일까 [이정우의 스포츠 랩소디]

파울루 벤투는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을 16강으로 이끈 후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이웃으로 살았던 일산에 위치한 아파트 주민들은 플래카드를 통해 그에게 감사의 인사말을 전했다. 한글과 포르투갈어로 써진 플래카드에 벤투 감독은 ‘Diretor Bento’로 표시됐다. 영어 단어 ‘디렉터(Director)’를 포르투갈어로 옮긴 것이다. 하지만 축구 감독은 영어로 디렉터가 아니다.야구 감독과 축구 감독은 영어로 전혀 다르다고 보도하는 국내 언론들이 있다. 미국에서 야구 감독은 ‘매니저(Manager)’이고, 다른 종목의 감독은 ‘헤드 코치(Head Coach)’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정확한 사실이 아니다. 미국에서 축구 감독은 헤드 코치라고도 불리지만 매니저라고 칭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축구 감독을 매니저라고 부르는 것은 잉글랜드에서 유래했다. 그에 반해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 축구 감독은 ‘헤드 코치(또는 그냥 코치)’라고 부른다. 잉글랜드와 독일 축구대표팀의 감독은 하는 일에서 큰 차이가 없다. 그럼에도 잉글랜드의 가레스 사우스게이트는 매니저, 독일의 요아힘 뢰브는 헤드 코치로 불렸다.최근의 프리미어리그(EPL)는 매니저와 헤드 코치를 구분하고 있다. 이 둘의 역할과 책임이 분명 다르기 때문이다. 현재 매니저라는 직책은 줄어들고 있고, 헤드 코치의 숫자는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다. 2022년 2월 기준 EPL 20명의 감독 중 매니저는 11명, 헤드 코치는 9명이었다. 문제는 특별한 기준 없이 많은 언론사가 헤드 코치와 매니저라는 호칭을 혼합해서 쓰고 있는 것이다. 호칭이 왔다 갔다 하니 팬들 입장에서는 헷갈릴 수밖에 없다. 각 호칭의 역할은 어떻게 다를까? 헤드 코치는 축구장의 마에스트로이다. 그들의 주요 업무는 ①전술적 접근 방식을 설계한다. 팀의 포메이션, 플레이 스타일 결정과 특정 상대에 맞춘 전략 고안 등이 여기에 속한다. ②선수 육성을 책임진다. 즉 선수단의 체력, 기술, 팀워크를 향상시킨다. ③전략과 선수 경기력에 근거해 선발 라인업을 결정한다. ④경기가 진행되는 중 전술 조정과 선수 교체 결정권을 행사한다. ⑤선수단에 동기를 부여하고, 경기장 안팎에서 리더십을 발휘한다.매니저의 주요 업무는 ①종합적인 선수 개발 계획을 수립한다. 즉 선수 계약, 이적, 방출을 결정한다. ②선수 급여, 직원 지출 등 다양한 재정 문제에 관여한다. ③행정 업무와 더불어 이사회와 코칭스태프 간에 가교 역할을 수행한다. ④팀을 대표해 미디어과 교류하고 홍보를 담당한다.따라서 헤드 코치는 주로 현장 문제(전술, 선발, 훈련, 동기 부여 등)를 담당한다. 그에 반해 매니저는 현장 외 문제(선수 영입, 예산 관리, 홍보 등)에 책임을 진다. 간단히 설명하면 헤드 코치는 선수 육성과 전술 전문가인데 반해, 매니저는 팀의 비즈니스 측면을 담당하는 전문가이다. 헤드 코치와 매니저라는 두 가지 역할을 한 명이 성공적으로 수행하기는 상당히 어렵다. 전술적 역량과 복잡한 경영 관리에도 경쟁력을 갖춰야 하기 때문이다. 보통 경험을 쌓은 헤드 코치가 자연스럽게 매니저 역할을 맡게 된다. 성공적으로 이를 수행한 대표적인 인사가 알렉스 퍼거슨, 아르센 벵거, 펩 과르디올라, 디에고 시메오네, 첼시 시절의 조제 무리뉴 등이다. 지난주 경질된 위르겐 클린스만은 헤드 코치일까 매니저일까? 국내 언론은 흔히 그를 가리켜 ‘선수단의 동기 부여에 초점을 맞춘 관리자형 지도자’라고 칭했다. 매니저라는 뉘앙스가 담겨 있다. 하지만 동기 부여는 헤드 코치의 임무다. 게다가 매니저는 현장 전략을 포함해 팀의 (거의) 모든 영역에 관여하기 때문에, 클린스만은 매니저가 될 수 없다.외신도 클린스만을 헤드 코치로 칭했다. 따라서 클린스만은 대표팀에 맞는 전술을 고안하고, 상대방을 분석하며, 적절한 선수 기용을 통해 피치에서 좋은 성과를 가져와야 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미국대표팀, 바이에른 뮌헨, 헤르타 BSC 감독을 거치며 그런 능력이 없다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난 상태였다. 그럼에도 대한축구협회는 클린스만을 대표팀 감독으로 임명하는 중대한 우를 범한 것이다.클린스만의 전술 부족을 그의 독특한 선수 경력에서 찾는 시각도 있다. 그는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7개 클럽에서 뛸 정도로 전형적인 저니맨이자 자유인이었다. 클린스만은 체계적이고 계획된 방식으로 축구에 접근하는 대신, 간섭이 덜 한 상태에서 즉흥적이고 출중한 개인 기량에 힘입어 세계적인 선수가 되었다. 따라서 타고난 축구 지능에 의지해 성공한 클린스만에게 다양한 전술을 가진 헤드 코치 역할을 바란 것 자체가 애초에 무리한 요구였다는 시각도 있다.클린스만은 미국대표팀 감독을 수행할 당시에도 ‘지나친 자신감’, ‘짜증이 날 정도의 긍정적인 태도’, ‘하루아침에 바뀌는 마음’, ‘비이성적인 결정’, ‘책임감 부족’ 등으로 많은 비난을 받았다. 또한 그의 지도 방식은 선수들의 신뢰를 얻지도 못했다. 비슷한 일이 지난 1년간 한국에서도 벌어지졌다. 일례로 클린스만 감독은 팀이 부진한 성적을 거둘 때마다, 아시안컵 결과로 자신을 판단해 달라고 말했다. 어리석게도 이 말을 믿은 필자는 아시안컵 이후 그가 자진 사퇴할 줄 알았다. 게다가 한국에서 아시안컵 결과를 분석하겠다는 클린스만은 귀국한 지 이틀도 안돼 미국에 있는 집으로 도망치듯이 떠났다. 그리고 여론에 밀려 경질돼 위약금만 챙기게 됐다.경희대 테크노경영대학원 객원교수 2024.02.15 08:00
스포츠일반

부산 탁구 세계선수권 대진 확정...한국, 남자는 폴란드-여자는 이탈리아와 개막전

한국 탁구대표팀의 2024 부산세계탁구선수권대회 대진이 결정됐다. 한국의 개막전 상대는 남자 폴란드, 여자 이탈리아다. 대회 개막식은 2월 17일 오후 네 시에 열린다.BNK부산은행 2024 부산세계탁구선수권대회의 ‘타임 테이블’이 정해졌다. 대회 조직위원회(공동위원장 박형준‧유승민)와 주최측인 국제탁구연맹(ITTF)이 각국의 경기시간과 테이블 배정을 확정한 뒤 29일 오후 연맹 홈페이지에 이를 게시했다. 조직위의 발표에 따르면 개최국 한국과 남녀 톱시드 중국, 우승후보 일본 등 주요 강국들의 경기가 메인경기장인 1, 2번 테이블에 주로 배치됐다. 한국 남녀대표팀은 그룹 예선 네 경기를 모두 1번 테이블에서 치르게 됐다. 3조 톱시드 남자대표팀은 2월 16일 오전 10시 유럽의 다크호스 폴란드를 상대로 개막전을 치른다. 5조 톱시드인 여자대표팀은 개막일인 같은 날 오후 5시 이탈리아와 첫 경기를 벌이게 됐다.개막전 이후 남자대표팀은 17일 오후 8시 뉴질랜드, 18일 오후 5시 칠레, 19일 오전 10시 인도와 차례로 예선을 치른다. 여자팀은 17일 오후 5시 말레이시아, 18일 오후 1시 푸에르토리코, 19일 오후 8시 쿠바와 각각 조별 예선 경기를 치르는 일정이다. 예선리그 마지막 날인 20일은 한국대표팀 경기가 없다.팀선수권대회인 2024 부산세계탁구선수권대회는 남녀 각 40개국이 5개국씩 8개 조로 분산돼 예선리그를 벌인 뒤 각조 3위까지가 본선에서 24강 토너먼트로 순위를 가리는 방식이다. 조 수위를 차지하면 16강에 직행하고, 2위나 3위가 되면 24강전을 벌여야 한다. 보다 수월한 본선 항해를 위해서라도 조 1위는 필수다.한국은 남녀 모두 객관적인 전력상 조 1위는 무난할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어렵게 출발해 대회 전체가 꼬이곤 하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는 예선리그 초반부터 신중한 경기운영이 요구된다. 남자3조 같은 그룹 야쿱 디야스(세계15위)가 있는 폴란드나 최근 전력이 급상승한 인도, 여자부 남미 최강자 애드리아나 디아즈(세계11위)의 푸에르토리코 등은 방심했다가는 자칫 낭패를 볼 수 있는 난적들이다.지난 2022년 청두 대회에서 조3위까지 밀려 결국 16강에 머문 여자팀의 경우는 특히 압도적인 기세로 승리의 기억과 자신감을 쌓아나갈 필요가 있다. 단체전 3연속 동메달을 기록 중인 남자대표팀도 더 높은 목표에 도전하기 위해서는 예선부터 단단한 응집력을 확인해야 한다. 홈 관중의 응원도 절실하다. 이번 대회 한국대표팀은 남자 장우진, 이상수(삼성생명), 임종훈, 안재현(이상 한국거래소), 박규현(미래에셋증권), 여자 전지희, 윤효빈(이상 미래에셋증권), 신유빈, 이은혜(이상 대한항공), 이시온(삼성생명)이 출전한다.타임 테이블 확정은 입장권 확보를 망설이던 팬들에게도 반가운 소식이다. 현재 예매가 진행 중인 에서 구체적인 좌석과 원하는 경기일정에 맞춰 입장권을 구매할 수 있게 됐다. 20일 끝나는 예선리그 이후 21일 남녀 24강전, 22일 8강전(여4경기/남2경기), 23일 남자 8강전(2경기)/여자 4강전, 24일 남자 4강전/여자 결승전, 25일 남자 결승전까지 본선 경기일정도 확인할 수 있다. 오는 2월 16일부터 25일까지 부산 벡스코에서 열리는 BNK부산은행 2024 부산세계탁구선수권대회는 한국탁구 사상 최초로 국내에서 개최되는 세계탁구선수권대회다. 7월 말 개최되는 파리올림픽 출전권도 걸려있어 더욱 치열한 경쟁이 예상된다. 전 세계의 탁구강호들이 모두 몰려오는 메가 이벤트다. 역사적 관점에서도, 관전의 흥미에서도 놓치기에는 아까운 기회다. 개막까지는 이제 약 2주가 남아있다.이은경 기자 2024.01.30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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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의 스포츠랩소디] 한국‧일본 선수가 레인저스 아닌 셀틱으로 가는 이유는?

스코틀랜드의 명문 클럽 셀틱이 K리그의 양현준(강원)을 노리고 있다. 이미 한국대표팀 공격수 오현규를 보유하고 있는 셀틱은 양현준 외에도 2명의 한국 선수를 영입 후보에 올려놓았다고 한다. 게다가 셀틱은 6명의 일본 선수가 소속된 팀이기도 하다.셀틱에서 뛰었거나 현재 소속되어 있는 동북아시아의 국가대표 선수는 13명이다. 국가별로 살펴보면 8명을 배출한 일본을 선두로 한국(3명), 중국(2명)이 뒤를 따르고 있다. 셀틱이 특히 일본과 한국 선수에 관심이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아시아 축구에 무지하거나 관심이 없는 대부분의 스코틀랜드 클럽과는 달리 셀틱은 전통적으로 아시아 선수에 개방적인 팀이다. 셀틱이 영입한 최초의 아시아 선수는 인도 출신의 아마추어 모하메드 살림이다. 맨발로 축구를 했던 살림은 관계자들을 매료시켰고, 1936년 셀틱의 일원이 되었다. 인종차별이 심했던 시절 셀틱은 실력만 보고 선수를 뽑은 것이다.2000년대 들어 아시아 선수들의 셀틱행은 본격화된다. 일본대표팀의 나카무라 슌스케는 2005년 셀틱에 입단해 4시즌 동안 128경기에 출전해 29골을 기록하며 맹활약했다. 특히 슌스케는 2007년 발롱도르 후보에 오른 데 이어, ‘스코틀랜드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누렸다. 기성용 선수가 2009년 셀틱에 입단할 당시에는 이미 클럽에 중국의 정즈와 일본의 미즈노 코키가 있었다. 유럽의 한 클럽에서 한중〮일〮 선수가 같이 뛰는 최초의 일이 벌어진 것이다. 최근 셀틱이 아시아 선수 영입에 좀 더 적극적인 것은 2021년부터 2년 동안 클럽을 성공적으로 이끈 엔지 포스테코글루 감독의 영향 때문이다. 그리스 출신의 호주인 포스테코글루는 호주대표팀을 아시안컵 정상에 올려놓았고, 일본 J리그의 요코하마에서도 우승을 거머쥐었다. 이러한 성공을 바탕으로 셀틱 감독이 된 그는 자신이 잘 아는 일본 선수들을 영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제도적 변화도 셀틱의 동북아시아 선수 영입에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대표적인 예가 브렉시트(Brexit,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다. 브렉시트 이후 유럽연합 출신 선수도 잉글랜드나 스코틀랜드에서 뛰려면 워크 퍼밋(취업 비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유럽 선수 영입이 까다롭게 바뀐 덕분에 영국리그를 목표로 하는 비유럽 선수들이 반사이익을 얻게 된다. 스코틀랜드 리그가 EPL보다 느슨한 워크 퍼밋 규정을 가진 점도 유리하게 작용했다. 게다가 잉글랜드나 유럽 부자 구단들에 비해 자금이 넉넉지 않은 셀틱에게 아시아리그에서 건너오는 선수들의 저렴한 몸값도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후루하시 쿄고, 마에다 다이젠, 하타테 레오는 셀틱이 J리그에서 비교적 적은 돈으로 영입하고도 성공한 케이스다. 이러자 리그의 하이버니안과 머더웰 등도 재능 있고 가성비가 좋은 J리그의 젊은 선수와 계약을 맺게 된다. 셀틱을 얘기할 때 레인저스가 빠질 수 없다. 스코틀랜드 축구를 대표하는 두 클럽이 맞붙는 ‘올드 펌 더비’는 세계에서 가장 치열한 더비다. 이들의 경기는 축구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셀틱과 레인저스가 가진 라이벌 의식은 종교(가톨릭 vs 신교도), 정치(노동당 vs 보수당), 민족(아일랜드 이민자 vs 스코틀랜드 원주민) 등의 이유로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그렇다면 레인저스를 거쳐 간 동북아시아 세 나라의 국가대표 선수는 몇 명일까? 한 명도 없다. 아시아 전체를 통틀어도 결과는 똑같다. 클럽은 151년 역사 동안 총 51개국의 국가대표 선수를 영입했으나, 단 한 명의 아시아 선수도 여기에 속하지 못했다.레인저스가 철저하게 아시아 선수를 외면한 이유가 궁금했다. 이에 필자는 다각적인 조사에 들어갔다. 팬클럽 게시판도 뒤졌고, 질문을 올려 그들의 답변도 들었다. 필자가 내린 결론은 레인저스는 셀틱보다 훨씬 보수적이고, 아시아 시장에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사실 레인저스의 폐쇄성은 그들의 반가톨릭 정책에서도 드러난다. 20세기 초부터 레인저스는 가톨릭교도 선수와 계약하지 않았고, 가톨릭 교인은 클럽에 취업할 수도 없었다. 심지어 가톨릭교도와 결혼했다는 이유로 레인저스를 떠난 선수도 있었다. 이러한 정책은 1989년 가톨릭 신자인 모 존스턴을 영입하며 폐지됐다. 그러자 팬들은 자신의 시즌 티켓을 불태우며 강력히 반발했다고 한다. 선수단 내에서도 불만이 나와, 존스턴 영입 기자회견에 참석한 레인저스 선수는 한 명도 없었다. 그에 반해 셀틱은 선수를 영입할 때 종교를 문제 삼은 적이 없다. 클럽이 “아시아 선수를 영입하지 않는다"라는 불문율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레인저스 팬도 일부 있다. 물론 이런 주장이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레인전스가 예전에 가졌던 반 가톨릭 정책도 불문율이었고, 클럽은 당시 이러한 정책의 존재를 공개적으로 부인했던 전력이 있다.2022 월드컵이 끝난 후 셀틱과 레인저스 등이 조규성 선수를 노린다는 기사가 나왔다. 이에 레인저스의 팬클럽인 ‘아이브록스 노이스(Ibrox Noise)’는 홈페이지와 독일의 축구미디어 ‘원 풋볼’ 등을 통해 상당히 거친 반응을 보였다. 이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레인저스의 명성을 이용해 선수의 가치를 높이려는 언론 플레이에 불과하다. 레인저스는 아시아 선수나 시장에 관심이 없다. 클럽의 시장은 유럽에 국한한다”고 한다.필자가 특히 놀란 점은 조규성을 가리켜 “Sung or whatever(성이든 뭐든, 성은 조규성을 의미)”라고 표기한 것이다. 또한 “레인저스 팬들은 아시아 선수보다 치킨차우멘(chicken chow mein, 중국식 볶음국수)에 관심이 더 많다”라는 표현에서도 인종차별을 느낄 수 있었다. 셀틱 소속의 일본 선수가 일부 레인저스 팬들로부터 인종차별을 당했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스코틀랜드 리그에 관심이 있는 축구 선수들에게 이 글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기를 바란다.이화여대 국제사무학과 초빙교수 2023.07.1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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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의 스포츠 랩소디]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축구 유니폼

1998 월드컵이 프랑스에서 열리자, 영국에 있는 한국 축구팬들은 환호했다. 필자도 그 중 하나였다. 필자는 대사관을 통해 대한민국의 첫 경기인 멕시코 전의 티켓을 구했고, 직관 준비에 들어갔다. 가정 먼저 필요한 것은 바로 대표팀 셔츠였다. 2000년대 들어 한국축구의 성장과 한류의 등장으로 인해 지금은 런던에서 한국대표팀 셔츠를 쉽게 구할 수 있다. 나이키 매장에 가면 자사가 후원하는 잉글랜드, 브라질, 네덜란드 등의 인기 팀과 함께 한국팀의 셔츠도 걸려있다. 심지어 축구전문매장에 가면 태극기도 살 수 있다. 1998 월드컵 한국대표팀의 킷(kit, 스포츠팀의 유니폼) 스폰서도 나이키였다. 하지만 당시 런던에는 한국팀 셔츠를 파는 매장이 없었다. 대표팀의 붉은 셔츠를 구할 수 없어서 발만 동동 굴리던 필자는 결국 대안으로 빨간색이 상징인 리버풀 셔츠를 입었다. 당시 리버풀의 셔츠 스폰서는 덴마크의 맥주회사 칼스버그였다. 고속열차 테제베(TGV)를 타고 도버와 칼레를 연결한 채널 터널을 지나 결전 장소인 리옹에 도착했다. 경기가 열리는 프랑스의 명문 클럽 올림피크 리옹의 홈구장에 도착하니 이미 많은 한국인이 모여 응원전을 벌이고 있었다. 다음 월드컵인 2002 대회가 한국에서 개최되는 관계로 국내의 여러 지자체 인사들도 이날 경기장을 찾았다. 수원시 관계자가 당시 필자에게 한마디 한 게 지금도 기억난다. “왜 칼스버그 옷을 입었나요?” 훗날 필자가 국내에서 이 셔츠를 입으면 칼스버그 맥주 판촉 사원으로 오인하는 일도 빈번하게 벌어졌다. 축구가 하나의 패션이 되어 응원하는 클럽 셔츠를 자랑스럽게 입고 다니는 현재의 국내 상황과는 너무 다른 환경이었던 것이다. 필자가 축구 셔츠를 사랑하게 된 계기는 199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0년 여름 필자는 서유럽을 한 달 동안 여행했다. 마침 이탈리아에서는 1990 월드컵이 열리고 있었고, 아시아예선을 수월하게 통과했던 당시 한국대표팀에 대한 기대도 컸었다. 하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3패(득점 1, 실점 6)를 기록한 것이다. 한국전쟁 후 열악한 상황에서 출전한 1954 스위스 월드컵을 제외하면, 한국 축구가 유일하게 승점 1도 획득하지 못한 대회였다. 1990 월드컵은 극단적인 수비축구로 진행됐기에 심각한 골 가뭄에 시달렸다. 그러나 흥미로운 스토리로 가득 채워진 대회이기도 했다. 아프리카 대륙의 돌풍을 처음으로 일으킨 카메룬. 4강에서 만난 서독과 잉글랜드전에서 나온 폴 게시코인의 감동적인 눈물. 잉글랜드의 유명한 PK 실축 징크스가 시작된 대회. 나폴리에서 열린 4강전에서 '나폴리의 신'이었던 마라도나가 시민들에게 그들의 조국인 이탈리아가 아니라 아르헨티나를 응원해달라고 한 전설적인 얘기 등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1990 월드컵은 필자가 축구 셔츠와 사랑에 빠지게 만든 대회이기도 했다. 당시 서독팀의 셔츠를 처음 본 순간 “축구 셔츠가 저렇게 아름답고 매력적일 수 있구나”하며 감탄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화려하고 다양한 디자인을 가져 패션 아이템으로도 주목받는 현재의 축구 셔츠는 1990년대를 지나면서 본격화되었다. 그전까지의 셔츠는 주로 단조로운 디자인에 단색 위주여서 세련미와는 거리가 있었다. 그런 시대에 서독팀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환상적인 디자인의 셔츠를 들고나온 것이다. 서독은 자신들의 전통적인 칼라인 흰색에 검정, 빨강, 금색으로 이루어진 국기 색을 창의적으로 조화시켜, 세계인의 관심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당시 필자는 서독대표팀의 셔츠를 사기 위해 이탈리아, 프랑스 등지에서 부단히 노력했다. 하지만 일정이 빡빡한 패키지 투어여서 개별적인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았다. 첫 해외여행이라 어리바리했던 점도 많았다. 일정이 파리를 마지막으로 끝났을 때 필자는 크게 실망했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서독팀 셔츠를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극적으로 일정이 바뀌어서, 프랑크푸르트를 경유해 귀국 비행기를 타게 됐다. 독일 땅에서는 셔츠를 꼭 살 수 있을 것 같은 좋은 예감이 들었다. 프랑크프루트 공항에서 6시간 대기한다는 말을 듣고, 필자는 택시를 잡아타고 시내로 나갔다. 시간이 빠듯해 불안했지만, 마지막 기회였기에 망설이지 않았다. 시내 상점 몇 군데를 돌아다닌 끝에 결국 눈에 아른거리던 유니폼을 발견했다. 정확히 말하면 셔츠는 끝내 못 샀다. 대신 서독팀의 트레이닝복을 샀지만,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기뻤다. 독일축구는 그 후에도 준수한 디자인의 셔츠를 계속 출시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1990년 셔츠를 뛰어넘는 혁신적인 셔츠는 나오지 않았다. 물론 셔츠에 대한 평가는 주관적이고 감정적이기 때문에 순위를 객관화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유럽의 다양한 언론이 여러 번에 걸쳐 발표한 ‘역사상 가장 멋진 축구 셔츠 리스트’에 서독의 1990 월드컵 셔츠는 언제나 최상위권 혹은 1등을 차지한다. "축구는 22명의 남자들이 90분 동안 공을 쫓고, 마지막에는 독일이 이긴다”라는 명언이 있다. 이렇듯 꾸준함과 강함의 상징이 독일축구였다. 그러한 독일이 2018, 2022 월드컵 조별 예선에서 연달아 탈락하며 체면을 구겼다. 그들의 전성기를 기억하는 올드팬들은 다시 한번 멋진 셔츠를 입고 부활하는 독일축구를 기대하고 있다. 이화여대 국제사무학과 초빙교수 2023.07.08 09:00
IT

보수 한도 50% 낮추고 주가 연동…'취임 1년' 네이버 최수연 독해졌다

취임 1년을 맞은 최수연 네이버 대표가 독한 마음으로 허리띠를 졸라맸다. 자신을 포함한 경영진 보수 눈높이를 낮춰 책임 경영 기조를 확고히 하고, 과거의 영광이 무색한 기업 가치를 끌어올려 국내 대표 플랫폼의 입지를 되찾겠다는 의지다.최수연 대표는 22일 경기도 성남시 그린팩토리에서 열린 제24기 정기 주주총회에서 "전 세계적 경제 상황의 불확실성 속에서도 기존 사업의 꾸준한 성장과 새로운 시장 개척으로 네이버의 글로벌 경쟁력을 입증할 것"이라며 "올 한 해에도 주주 가치 제고를 위해 팀 네이버는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을 약속한다"고 말했다.이날 주총에 상정된 2022년 재무제표 승인의 건·기타비상무이사 변대규 선임의 건·이사 보수 한도 승인의 건 모두 무리 없이 통과했다.가장 눈에 띄는 것은 사외이사를 포함한 이사 7명의 보수 한도를 150억원에서 80억원으로 낮춘 것이다. 네이버가 이사 보수 한도를 줄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네이버 관계자는 "한도와 지급액의 차이가 크기도 하고, 비용 감축 방향성에 맞췄다. 책임 경영 의지도 반영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한도가 150억원이었을 때 지급한 보수 총액은 40억원에 그쳤다. 한도의 절반도 써본 적이 거의 없다는 게 회사의 설명이다.이와 별개로 최수연 대표는 스스로에게 엄격한 잣대를 적용했다.기본 급여보다 인센티브 등 상여의 비중을 키워 성과 중심의 CEO(최고경영자) 보상체계를 구축했다. 특히 전체 보수의 45%를 차지하는 제한조건부주식(RSU)은 코스피200 내 기업 대비 상대적 주가 상승률 백분위에 따라 0~150% 안에서 지급 규모를 결정한다.회사 주가가 소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구조다.지난해 최수연 대표는 총 11억원을 보수로 받았는데, RSU로 받은 금액은 0원이었다. 1년 전 대비 주가가 35%가량 떨어지며 부진했던 탓이다.이처럼 서로 다른 보상 구조 때문에 최수연 대표의 연봉은 유럽 사업을 담당하는 한성숙 전 대표(23억원)와 채선주 대외/ESG정책 대표(21억6200만원)보다 적었다. 2년 전만 해도 카카오와 시가총액 3위를 다툴 정도로 몸값이 올랐던 네이버는 현재 가까스로 9위를 지키고 있다. 주력인 검색 광고와 콘텐츠, 커머스를 넘어설 새로운 무기가 절실한 상황이다.지난 1월 1조6700억원을 쏟아 품은 북미 최대 패션 C2C(개인 간 거래) 포시마크는 올해가 광고 시너지 창출 방안 등 전략을 수립하는 원년이 될 전망이다.또 올 상반기에는 서치GPT를 출시할 예정이다. 회사의 본질인 검색 기능에 챗GPT로 관심이 뜨거운 최신 인공지능(AI) 기술을 접목해 서비스 차별화를 노린다. 한국어에 특화해 복잡한 조건의 쇼핑 아이템 추천과 일상 고민 등 질문에도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목표다. B2B(기업 간 거래) 유료 서비스 등 사업 모델을 검토하는 것으로 전해졌다.지난해 말 카타르 월드컵 생중계 누적 시청자 수 1억명을 기록한 '미래 먹거리' 차세대 커뮤니티 서비스는 스포츠 카테고리를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한국대표팀 부진으로 WBC는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지만 내달 개막하는 KBO리그에서 열기를 이어갈 방침이다.정길준 기자 kjkj@edaily.co.kr 2023.03.23 07:00
프로축구

[오피셜] 월드컵 리턴 매치 성사… 3월 28일 우루과이와 A매치

한국과 우루과이가 카타르 월드컵 조별리그에서 맞붙은 지 넉 달 만에 다시 대결한다.대한축구협회는 오는 3월 28일 우루과이와 친선 A매치를 갖기로 했다고 13일 발표했다. 장소는 서울월드컵경기장이며, 킥오프 시간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이로써 새 감독이 부임한 뒤 처음 맞이하는 A매치 기간에 한국대표팀은 3월 24일 콜롬비아를 상대로 울산에서, 28일에는 우루과이와 각각 경기를 치르게 됐다.지난해 11월 카타르 월드컵 조별리그 첫 경기에서 한국과 우루과이는 접전 끝에 0-0으로 비긴 바 있다. 조별리그 결과 두 팀은 똑같이 1승1무1패를 기록하고 골 득실까지 같았다. 하지만 한국이 다득점에 앞서 16강에 극적으로 진출하고 우루과이는 탈락했다.기대에 못 미친 월드컵 성적에도 불구하고 우루과이는 디에고 알론소 감독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동안 노장 3인방인 루이스 수아레스(36, 그레미우), 에딘손 카바니(36, 발렌시아), 디에고 고딘(37, 벨레스 사스필드)이 10년 넘게 우루과이 대표팀을 이끌어 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페데리코 발베르데(25, 레알 마드리드), 로드리고 벤탄쿠르(26, 토트넘), 다르윈 누네스(24, 리버풀) 등으로 중심이 옮겨가는 추세다.현재 우루과이의 FIFA 랭킹은 16위로, 25위인 한국보다 높다. 우루과이 대표팀은 3월 24일 일본에서 경기를 치른 뒤 입국할 예정이다.한국과 우루과이의 역대 전적은 9전 1승 2무 6패로 우리가 뒤진다. 2018년 10월 서울에서 열린 친선경기에서 황의조와 정우영(알사드)의 골로 2-1로 이긴 것이 유일한 승리다. 김희웅 기자 2023.02.13 15:20
해외축구

[이정우의 스포츠 랩소디] 외국인 감독의 숙명, 조국을 상대하다

지난 21번의 월드컵 대회에서 외국인 감독이 대표팀을 이끈 비율은 26.9%다. 즉 평균적으로 역대 월드컵에 참여한 국가의 네 나라 중 하나는 외국인 감독이 맡았다는 얘기다. 특히 2006 독일 월드컵은 외국인 감독의 전성시대였다. 참가국의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15개국 대표팀을 외국인이 이끌었다. 제22회 월드컵인 2022 카타르 대회 참가국 중 대표팀 감독으로 외국인을 선임한 팀은 9개 나라다. 에콰도르, 카타르, 이란, 멕시코, 사우디 아라비아, 코스타리카, 벨기에, 캐나다와 대한민국이 외국인 감독을 가진 나라다. 에콰도르와 멕시코는 아르헨티나 감독을 택했고 카타르와 벨기에는 스페인 출신 감독이 맡는다. 사우디 아라비아와 캐나다의 감독은 각각 프랑스와 잉글랜드 출신이다. 근래에 들어 명감독을 많이 배출한 포르투갈은 한국과 이란을 지휘한다. 코스타리카의 감독은 콜롬비아 출신이다. 외국인 감독이 맡은 9개국 중 4개가 아시아 국가다. 일본과 호주는 2022 월드컵에 자국 출신 감독으로 나서지만, 이들도 외국인 감독을 즐겨 쓴다. 아시아 국가가 외국인 감독을 선호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자국 감독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진 축구 기술을 가진 외국인 감독이 대표팀을 지휘해 자국 축구의 수준을 높이고, 궁극적으로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길 기대한다. 현재 2022 월드컵에서 개최국 카타르를 제외한 아시아 국가들이 선전하고 있다. 분명 외국인 감독이 이들의 선전에 한몫했다고 본다. 하지만 외국인 감독이 월드컵에서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린 적은 한 번도 없다. 이들이 거둔 가장 좋은 성적은 준우승이었다. 잉글랜드의 조지 레이노는 스웨덴 감독으로 1958 스웨덴 월드컵 결승에 올랐으나, 펠레의 브라질에 패해 준우승에 머문다. 오스트리아의 에른스트 하펠은 네덜란드를 이끌고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 결승 진출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우승은 개최국 아르헨티나가 차지했다. 축구 강국은 전통적으로 외국인 감독 선임에 인색했다. 독일과 브라질은 한 번도 외국인에게 월드컵 대회를 맡긴 적이 없다. 아르헨티나, 이탈리아, 프랑스는 각각 1번 외국인 감독과 함께 월드컵에 나왔을 뿐이다. 좋지 않은 성적에도 극도로 외국인 감독을 거부하는 나라도 있다. 스코틀랜드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8번 월드컵에 출전해 매번 1라운드에서 탈락했지만, 한 번도 외국인 감독과 월드컵에 나온 적이 없다. 그에 반해 2022 대회에도 참가 중인 에콰도르는 월드컵 4번 출전을 모두 외국인 감독과 함께했다. 축구 종가인 잉글랜드도 외국인 감독 선임에 거부감을 가진 나라였다. 잉글랜드는 1990 월드컵에서 4강에 올랐지만 1994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한다. 자국에서 개최한 유로 96에서 4강에 올라 부활하는 듯이 보였던 잉글랜드는 1998 월드컵에서는 16강에서 탈락했다. 유로 2000에서는 조별 라운드 통과에 실패했다. 이렇게 부진한 경기력을 보이던 잉글랜드가 2002 월드컵 유럽 예선 첫 경기에서 독일에 패하자, 잉글랜드축구협회(FA)는 외국인 감독을 임명하는 초강수를 뒀다. 스웨덴 출신의 스벤 에릭손이 잉글랜드 축구 역사상 최초의 외국인 감독으로 선임됐다. 에릭손은 팀을 빠르게 재정비했다. 그의 지휘 아래 승승장구하던 잉글랜드는 뮌헨에서 열린 월드컵 예선전에서 독일을 5-1로 대파한다. 에릭손은 잉글랜드의 영웅이 되었다. 그를 찬양하는 노래까지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 2001년 11월 잉글랜드가 스웨덴과 친선 경기를 갖게 되자, 영국 언론의 관심은 에릭손에게 쏠린다. 비록 친선 경기였지만 에릭손 감독이 그의 조국 스웨덴을 상대하기 때문이다. 베팅업체 윌리엄 힐은 에릭손이 경기 전 어느 나라 국가를 부를지 내기까지 걸었다. 에릭손은 경기를 하루 앞두고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스웨덴의 모든 경기를 응원하지만, 내일은 그렇지 않다. 잉글랜드는 지난 33년 동안 스웨덴을 이기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잉글랜드가 이길 차례다.” 에릭손의 잉글랜드는 2002 월드컵과 2006 월드컵에서 연달아 스웨덴과 한 조에 속했다. 두 나라가 한조에 속할 때마다 그가 보여준 난처한 웃음이 필자는 지금도 기억난다. 잉글랜드 감독으로 최선을 다해야 하는 에릭손. 하지만 조국을 상대로 이겨야 하는 그의 마음은 복잡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국대표팀 감독 파울루 벤투는 선수로 나선 2002 월드컵에서 한국에 0-1로 지면서 16강 진출에 실패했다. 바로 그 경기가 벤투의 대표팀 은퇴 경기였다. 지도자로 변신한 벤투는 포르투갈 대표팀을 이끌고 2014 월드컵에서 승점 4를 기록했으나, 골 득실에 밀려 16강 진출에 다시 한번 실패한다. 벤투는 20년전 자신을 은퇴시킨 한국을 이끌고 2022 월드컵에 나왔다. 벤투가 세 번째 도전하는 16강 길목에 그의 조국 포르투갈이 버티고 있다. 운명의 장난이 참 얄궂다. 그는 “조국을 상대로 하는 경기는 처음이지만, 프로페셔널 지도자로 한국의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벤투는 지난 4년 동안 그의 빌드업 철학을 한국 축구에 이식했고, 우루과이를 상대로 경기를 주도했다. 하지만 승리가 필요했던 가나와의 경기에서는 왼쪽 측면이 무너지며 아쉽게 패했다. 설상가상으로 정당한 항의를 하던 벤투는 퇴장까지 당했다. 12월 3일 포르투갈과의 경기 결과에 따라 벤투와 한국대표팀의 동행은 끝날 수도 있고 연장될 수도 있다. 그와 한국축구가 이번에는 웃으면서 월드컵을 마무리하길 기원한다. 이화여대 국제사무학과 초빙교수 2022.11.30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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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의 스포츠 랩소디] 악연에서 인연으로, 포르투갈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은 우루과이, 가나, 포르투갈과 함께 H조에 속해 있다. 포르투갈은 2022년 10월 기준으로 FIFA(국제축구연맹) 랭킹 9위에 올라있는 강호다. 한국이 16강에 진출하기 위해서나 브라질을 피해 8강까지 노린다면 포르투갈과의 경기 결과가 중요하다. 포르투갈은 에우제비오, 루이스 피구,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등과 같은 세계적인 축구 스타를 배출한 나라다. 1966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돌풍을 일으켰던 북한은 8강전에서 포르투갈에 3-0으로 앞서다, 에우제비오에게 4골을 헌납하고 5-3으로 역전패했다. 하지만 한국은 20년 전인 2002 한일 월드컵에서 포르투갈을 만나 1-0으로 이긴 기분 좋은 기억을 갖고 있다. 당시 수비형 미드필더로 한국전에서 풀 타임 경기를 뛴 파울루 벤투가 현재 한국대표팀의 감독이다. 벤투외에도 현 대표팀에는 포르투갈 출신 코치가 4명 포진해 있다. 2002 월드컵 이후 거스 히딩크 감독의 후임으로 한국대표팀을 맡은 움베르투 코엘류도 포르투갈 출신이었다. 이외에도 전북 현대의 감독으로 K리그 2연패와 FA컵 우승을 이끈 조제 모라이스도 포르투갈인이다. 이렇듯 21세기 들어 한국과 포르투갈은 축구 분야에서 교류가 제법 많았다. 축구를 제외한 다른 분야에서 한국과 포르투갈의 교류는 사실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비록 간접적이지만 역사적으로 한국과 포르투갈의 관계는 악연으로 시작됐다. 그에 반해 포르투갈의 국민성은 의외로 한국인과 유사한 점이 꽤 많다고 한다. 20년 만에 우리는 월드컵에서 포르투갈을 다시 만났다. 한국과 포르투갈은 어떤 인연을 갖고 있을까? 발전된 항해술을 기반으로 유럽인들은 15세기 들어 세계 곳곳을 탐험했다. 이들은 아메리카대륙으로 가는 항로를 발견했고,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 인도, 동아시아 등으로 진출하는 등 세계를 일주했다. 17세기까지 이어진 이 시기를 대항해시대(Age of Discovery)라고 부른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필두로 한 이 탐험에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이 가세했고, 각 대륙과 문명이 연결되기 시작한다. 명실상부한 글로벌 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북유럽의 바이킹이 해적질을 일정한 지역에 한정적으로 한 것에 비해, 포르투갈은 세계 해적 역사의 원조다. 유럽 서쪽 구석에 위치한 포르투갈은 땅이 좁고 농지는 척박했다. 그러나 당시 포르투갈 국력으로는 육로를 통해 해외에 진출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생존을 위해 대서양과 아프리카에 진출했다. 이들은 희망봉을 발견했고,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했다. 교역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조선에 처음 발을 디딘 서양인도 포르투갈인으로 추측된다. 네덜란드의 하멜보다 70여년 앞서 이들이 조선에 도착한 기록이 선조수정실록과 영국 문헌에 남아있다. 한편 포르투갈 탐험대는 표류 끝에 1543년 일본에 도착한다. 이들이 일본에 판 것이 바로 서양의 근대적인 장총이었다. 현재 가격 20억 원에 해당하는 은을 주고 2정의 총을 구입한 일본은 역공학(reverse engineering, 상품을 분해하여 생산 방식을 알아내는 것)에 돌입한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노력 끝에 일본은 총을 대량 생산하는 데 성공한다. 조총이 개발된 것이다. 조선도 이 시기에 총을 만들 기회가 있었으나, 지도자들의 무관심으로 금쪽같은 시간을 날렸다. 결국 16만 명의 조총수를 앞세워 일본은 임진왜란을 일으킨다. 당시 일본은 아프리카에서 온 흑인 용병까지 거느리고 있었는데, 이들은 포르투갈 영토인 마카오를 통해 건너왔다고 한다. 포르투갈과 무역을 오래 한 일본은 이들의 언어를 외래어로 많이 받아들였고, 이 중에 상당수가 일제 식민지 시대에 한반도로 전파됐다. 대표적인 예로 식품류로는 빵(Pao), 자몽(Jamboa), 담배(Tabaco), 카스텔라(Castella), 소보로(Soboro) 등이 있다. 튀김 요리를 일컫는 덴뿌라와 샐러드를 의미하는 사라다도 포르투갈어에서 유래했다. 이외에 소매가 없는 옷인 조끼와 속옷인 메리야스도 포르투갈어가 기원이다. 포르투갈의 역사는 동전의 양면과 같이 상반된 모습을 담고 있다. 이들은 대항해 시절 미지의 땅을 개척해 부와 명예를 얻었다. 하지만 이들은 역사에서 가해자보다 피해자로서 훨씬 오랜 시간을 보냈다. 기원전부터 포르투갈은 로마제국의 지배를 400여년 받았다. 로마의 철수 이후 게르만족이 이들을 공격했다. 8세기 들어서 포르투갈은 무어인(Moors,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한 이슬람교도)에게 지배당했고, 다시 기독교 땅으로 돌아오기까지 무려 500년 이상이 걸렸다. 내실이 단단하지 않았던 작은 나라 포르투갈은 식민지 전쟁에서도 다른 유럽 열강들에게 밀리게 된다. 1580년부터 60년간 스페인의 지배를 당하기도 했던 포르투갈은 국력이 계속 약해졌다. 19세기 들어서 프랑스의 나폴레옹은 포르투갈을 침략했다. 이들의 최대 식민지였던 브라질도 독립했다. 이후 내전을 겪은 포르투갈은 1926년 군사 쿠테타가 발생해 독재정권이 1974년까지 존재했다. 수많은 외침과 독재 정권 등 여러 면에서 포르투갈은 한국과도 닮은 점이 많다. 포르투갈의 민중음악인 파두(Fado)가 이들이 겪은 파란만장한 역사를 보여준다. 파두의 어원은 숙명을 의미하는 라틴어 파툼(Fatum, 로마신화에 나오는 운명의 신)에서 유래했다. 파두는 기약 없는 그리움을 담은 노래로 한국인의 정서 한(恨)과 일맥상통한다. 대항해 시절 미지의 땅을 찾아 떠난 남편, 연인과 아들을 기다리는 여인들의 절망과 한숨을 담은 노래 파두. 그리고 한민족의 얼과 한을 담은 아리랑. 슬프고 한스러운 역사를 가진 한국과 포르투갈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이화여대 국제사무학과 초빙교수 2022.11.16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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